1987년, 여름. 홍콩의 습기는 콘크리트 벽을 타고 올라와 복도식 아파트의 페인트칠을 들뜨게 만들었다. 선풍기 날개가 돌아가는 소리만이 거실을 채우고 있었다. 임완청은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의 잡음을 듣고 있었는데, 현관문 너머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렸다. 어머니의 뒤에 서 있는 소년은 키가 또래치고 비정상적으로 컸다. 열네 살이라고 했다. 마른 팔다리가 길게 늘어져 있었고, 검은 머리카락 아래 동그란 눈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짐이라고는 낡은 천 가방 하나. 임완청의 어머니가 소년의 등을 살짝 밀며 거실 안으로 들여보냈다.
여기가 네 방이야. 누나랑 같이 쓰는 거니까 사이좋게 지내.
어머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년은 신발을 벗고 거실 한가운데 서서 천장의 선풍기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소파 위의 임완청을 발견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연스럽고, 아무런 경계심 없는 웃음이었다.
누나? 나 이공팔이야. 잘 부탁해.
그 목소리에는 보육원에서 막 꺼내어진 아이의 불안 같은 것이 단 한 톨도 섞여 있지 않았다. 임완청은 소파에서 상체를 일으켜 소년을 보았다. 열네 살치고 너무 큰 키, 너무 맑은 눈, 너무 가벼운 인사. 천 가방의 지퍼가 반쯤 열려 있었고 그 안에는 빗 하나와 접힌 옷가지 두어 벌이 전부였다.
소년은 임완청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미 방 안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벽에 붙은 영화 포스터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낯선 집에 들어온 고양이가 구석구석 냄새를 맡듯, 그는 이 공간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작업을 이미 시작하고 있었다.
이거 뭐야, 무서운 영화? 누나 이런 거 좋아해?
손가락이 가리킨 건 《천녀유혼》의 포스터였다. 임완청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년은 또 다른 벽으로 시선을 옮겼다. 관심이 산만한 게 아니라, 모든 것에 동시에 호기심을 쏟아붓는 종류의 아이였다. 부엌에서 어머니가 컵에 물을 따르는 소리가 들렸고, 밖에서는 이층 아줌마가 빨래를 널며 광동어로 이웃집 아들 험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홍콩의 평범한 여름 오후. 그 한가운데에 예고 없이 끼어든 소년 하나.
임완청의 항의가 부엌까지 날아갔다. 컵에 물을 따르던 어머니의 손이 잠깐 멈췄다가, 곧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움직였다. 수돗물이 컵을 채우는 소리가 거실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완청아, 방이 몇 개야 우리 집이. 거실 아니면 네 방이지. 그리고 아직 애잖아, 열네 살이야. 남자가 어딨어.
어머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이 좁은 아파트에서 선택지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방 하나, 거실 하나, 부엌 겸 식당. 그게 전부인 공간에 세 식구도 아닌 네 식구가 구겨 넣어져야 했다. 임완청은 이를 갈며 소파 등받이를 손으로 내리쳤지만, 어머니는 이미 물컵을 들고 이공팔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이공팔은 그 와중에도 포스터 구경을 멈추지 않았다. 임완청의 항의가 자신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얼굴에는 상처받은 기색이라곤 한 점도 없었다. 오히려 고개를 돌려 임완청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이 묘했다. 미안하다는 뉘앙스가 아니라, 재미있는 걸 봤다는 표정에 가까웠다.
누나, 나 잠잘 때 되게 조용해. 코도 안 골아. 진짜야.
그 한마디가 끝이었다. 변명도, 눈치도, 비위 맞추기도 없었다. 마치 이 상황이 당연한 것처럼, 혹은 당연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신경 쓸 영역이 아니라는 듯. 소년은 어머니가 건넨 물컵을 두 손으로 받아들고 단숨에 비운 뒤, 손등으로 입을 훔쳤다. 그리고 천 가방을 들어 올려 방 안 구석, 벽과 옷장 사이의 좁은 틈새를 가리켰다.
나 여기서 자면 되지? 딱 맞는다.
사람 하나 겨우 누울 정도의 바닥이었다. 이공팔은 그 비좁은 공간을 마치 특등석이라도 배정받은 양 만족스러운 눈으로 훑었다. 선풍기 바람이 소년의 마른 팔에 붙은 솜털을 흔들었고, 열린 창문 너머로 아래층 골목에서 아이들이 공을 차는 소리가 올라왔다. 임완청은 소파 위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여름이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꺾여버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알았어. 영화 볼 때 조용히 하면 되지?
소년의 대답은 짧고 깔끔했다. 반박도 없고, 삐진 기색도 없었다. 마치 누군가 내일 날씨를 알려준 것처럼, 정보를 수신하고 저장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이공팔은 가방 지퍼를 열어 안에서 작은 빗을 꺼냈다. 플라스틱 빗살이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보육원에서부터 들고 다닌 모양이었다. 그걸 한 번 손바닥 위에서 뒤집더니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임완청이 말한 '구워삶았다'는 부분에서 소년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이번에는 웃음소리까지 새어나왔다. 킥, 하는 짧은 숨. 재미있어서 웃는 건지, 황당해서 웃는 건지 구분이 안 되는 종류의 소리였다.
구워삶긴. 아줌마가 먼저 오라고 했는데. 나도 왜 데려가는지 모르겠어, 근데 여기 좋다. 선풍기도 있고.
소년은 벽과 옷장 사이의 좁은 틈에 주저앉았다. 긴 다리를 접어 무릎을 세운 자세가 마치 골목 구석에 웅크린 들고양이 같았다. 등을 벽에 기대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선풍기 날개가 돌아가는 것을 눈으로 쫓는 듯했다. 보육원에는 선풍기가 없었을까. 아니면 있어도 자기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을까. 어느 쪽이든 소년은 그 바람을 피부로 받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만족이라는 감정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가 그 얼굴 위에 떠 있었다.
임완청의 물건을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에 대해서는 이미 잊은 듯했다. 아니, 기억하고 있되 중요도를 스스로 분류해버린 것이다. 소년에게 규칙이란 벽에 붙은 포스터와 같았다. 존재는 인지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행동 반경을 실질적으로 제한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부엌에서 어머니가 쌀을 씻는 소리가 철썩철썩 흘러왔고, 창밖의 빨래줄에 걸린 흰 셔츠가 바람에 펄럭였다. 이공팔은 눈을 감았다. 마치 원래부터 여기 있었다는 듯이.
누나, 그 영화 나도 같이 봐도 돼? 조용히 볼게.
이공팔은 눈을 떴다. 천장의 선풍기 날개를 따라가던 시선이 임완청 쪽으로 굴러왔다. 벽에 기댄 채 무릎을 세우고 앉은 자세 그대로, 소년은 자기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접힌 무릎 위로 삐져나온 발목이 교복 바지 밑단 아래로 길게 드러나 있었다. 성장기의 속도를 옷이 따라잡지 못한 흔적이었다. 바짓단이 복숭아뼈 위에서 끝나 있었고,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이 타일 바닥에 닿아 있었다.
몰라. 재본 적 없어.
대답이 너무 태연했다. 보육원에서는 줄 세워서 키를 재는 일 따위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혹은 있었어도 이 소년이 기억할 종류의 정보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공팔은 벽에서 등을 떼고 일어섰다. 관절이 우두둑 소리를 냈다. 열네 살의 뼈가 내는 소리치고는 지나치게 건조했다. 서자 비로소 그 키가 공간 안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임완청의 방은 좁았다. 천장이 낮은 편도 아닌데, 소년이 서 있으니 방 자체가 한 치수 줄어든 것 같은 착시가 일었다.
이공팔은 임완청 앞으로 두어 걸음 다가왔다. 가까이 서니 확실했다. 아직 임완청보다 작았다. 한 뼘은 아니고, 손가락 두세 마디 정도. 하지만 그 차이가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건 소년의 어깨 너비와 손발 크기가 이미 예고하고 있었다. 손이 컸다. 발도 컸다. 몸통만 아직 따라오지 못한 채, 사지가 먼저 자라버린 기형적인 균형. 소년은 자기 정수리와 임완청의 눈높이를 번갈아 보더니, 손바닥을 펼쳐 자기 머리 위에 수평으로 올렸다. 그 손을 그대로 임완청 쪽으로 밀어 비교하는 시늉을 했다.
진짜네. 누나가 더 크다. 근데 나 아직 크는 중이거든?
말끝이 올라갔다. 자랑도 아니고 불만도 아닌, 단순한 사실 진술. 소년의 검은 눈동자가 임완청의 얼굴을 가까이서 올려다보았다. 이 거리에서 보니 속눈썹이 길었다. 혼혈의 흔적이 얼굴 곳곳에, 특히 눈두덩의 깊이와 콧대의 각도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완전히 현지인이었다. 광동어 억양도 완벽했고, 피부색도 거리의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단지 골격만이, 뼈대만이 어딘가 다른 유전자의 설계도를 따르고 있었다.
금방 넘을 거야. 내기할까?
소년이 씩 웃었다. 도전적인 것이 아니라 순전히 즐거운 웃음이었다. 마치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키가 훌쩍 자라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는 듯. 창밖에서 빨래줄의 셔츠가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고, 부엌에서는 어머니가 찬장을 여닫는 소리가 났다. 이공팔은 다시 벽 틈새로 돌아가 주저앉으며, 주머니에서 누런 빗을 꺼내 손가락 사이로 돌렸다. 빗살 끝이 햇빛에 반짝였다.
임완청이 소파에서 일어나 TV 앞으로 걸어갔다. 선반 위에 비디오테이프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손가락이 테이프 등줄기를 하나하나 훑으며 오늘의 선택지를 고르고 있었다. 방 안에는 선풍기가 돌아가는 윙윙거림과 부엌에서 흘러오는 그릇 부딪히는 소리만 남았다.
이공팔은 벽 틈새에 주저앉은 채 빗을 손가락 사이로 돌리다가, 임완청의 등을 바라보았다. 소녀의 등 뒤로 드러난 목덜미가 땀에 살짝 젖어 있었다. 여름이었다. 홍콩의 7월은 사람의 피부 위에 얇은 물막을 씌워놓는 계절이었다. 소년은 빗을 주머니에 도로 넣고, 무릎을 끌어안은 채 턱을 올렸다. 호기심이라기보다는 멍한 관찰에 가까운 시선이었다.
뭐 볼 건데?
소년의 목소리는 낮지 않았다. 변성기가 아직 덜 온 목소리. 약간 갈라지는 듯하면서도 높은 톤이 남아 있었다. 임완청이 테이프 하나를 뽑아들었다. 이공팔은 그 동작을 눈으로 따라가며, 긴 다리를 쭉 펴서 타일 바닥 위에 늘어놓았다.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바닥의 차가움이 좋은 모양이었다.
소년은 약속대로 입을 다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조용히 보겠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 '조용히'의 정의가 이 소년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아직 검증된 바 없었다. 이공팔은 등을 벽에 바짝 붙이고, 임완청이 테이프를 기계에 밀어넣는 소리, 철컥, 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나 영화 처음 봐. TV로.
그 한마디를 끝으로 소년은 정말 입을 닫았다. 보육원에는 TV가 있었을 수도 있고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소년이 그 앞에 앉아 영화 한 편을 끝까지 본 적은 없는 모양이었다. 선풍기 바람이 소년의 앞머리를 흔들었고, 화면에 푸른 빛이 켜지자 방 안의 공기가 한 톤 어두워졌다. 이공팔의 검은 눈동자에 TV의 잔상이 비쳤다. 소년은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이 벽 틈새에 박혀 있던 가구처럼.
이공팔은 약속대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벽 틈새에 박혀 앉은 채, 긴 다리를 접은 자세 그대로. 검은 눈동자가 TV 화면을 향해 있었다. 화면 속에서 한 남자가 칼을 들고 어두운 골목을 걸어가고 있었다. 무협인지 느와르인지 구분이 모호한, 70년대 홍콩 영화 특유의 저예산 미장센. 조명이 과하게 붉고, 음악이 과하게 비장했다. 소년의 눈이 깜빡이지 않았다. 화면에서 피가 튀었다. 칼이 살을 가르는 장면에서 소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감탄도 아니고 혐오도 아닌, 그저 새로운 자극을 수신하는 신경의 반응. 열네 살의 얼굴에 깃든 그 표정은 기묘하게 중립적이었다.
이거 진짜야?
소년이 속삭이듯 물었다. 조용히 보겠다는 약속을 깬 건 채 3분도 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목소리가 워낙 작았으므로 위반이라고 하기엔 애매했다. 화면 속 남자가 바닥에 쓰러진 상대의 목을 밟고 있었다. 이공팔의 눈동자가 그 장면을 정확히 추적하고 있었다. 발이 목에 닿는 각도, 쓰러진 자의 팔이 허공을 긁는 동작. 소년은 그걸 보며 고개를 아주 조금 옆으로 기울였다. 강아지가 처음 보는 물체를 살피는 것과 같은 각도였다.
부엌에서 어머니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얇게 스며들었다. 창밖에서는 아래층 아줌마가 빨래를 걷으며 이웃과 광동어로 고성방가를 벌이고 있었다. 평범한 오후. 평범한 여름. 그 안에서 열네 살짜리 소년이 화면 속의 폭력을 마치 교육 영상처럼 조용히 흡수하고 있었다. 선풍기 바람이 소년의 앞머리를 한 올 들어올렸다가 놓았다. 이공팔은 시선을 화면에서 떼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바닥 타일의 이음새를 긁었다. 사각사각. 손톱이 시멘트 줄눈을 긁는 소리가 선풍기 소음 아래 깔렸다.
누나, 이 사람 왜 죽여? 돈 때문이야?
두 번째 위반. 소년의 목소리에는 도덕적 판단이 실려 있지 않았다. 순수한 궁금증. 왜 하늘이 파란지 묻는 것과 같은 톤이었다.
임완청의 목소리가 짧게 끊었다. 화면에서는 장철 감독의 <잔권(殘缺)>이 흘러가고 있었다. 1978년작. 쇼 브라더스 특유의 과장된 혈색 조명 아래, 팔 하나가 잘려나간 사내가 이를 악물고 있었다. 복수극의 전형. 소년의 질문은 그 사내의 동기를 묻고 있었지만, 임완청에게는 그저 소음이었다.
이공팔의 입이 닫혔다. 혀끝에 올라왔던 세 번째 질문이 목구멍 아래로 도로 내려갔다. 소년은 임완청의 눈썹이 찌푸려지는 각도를 정확히 읽었다. 귀찮음. 소년은 그 감정을 읽는 데 능숙했다. 보육원에서 어른들의 표정을 읽는 건 생존 기술이었으니까. 이공팔은 입술을 다물고 손가락으로 바닥 타일을 두드리는 것마저 멈췄다. 대신 긴 다리를 더 깊이 접어 무릎 사이에 턱을 묻었다. 화면의 빛이 소년의 검은 눈동자 위에서 붉게, 노랗게, 다시 검게 변하고 있었다.
알았어.
그 말이 전부였다. 변성기 전의 얇은 목소리가 선풍기 소음 아래로 묻혔다. 소년은 정말로 입을 닫았다. 화면 속에서 칼이 허공을 갈랐고, 피가 튀었고,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이공팔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눈이 깜빡이지 않았다. 영화의 한 프레임 한 프레임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소년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자기 팔뚝을 긁었다. 팔뚝 안쪽의 얇은 피부 위로 보육원 시절의 흐릿한 흉터 하나가 선풍기 바람에 드러났다가 소매에 덮였다.
10분이 지났다. 소년은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화면에서 주인공이 외다리로 적을 걷어차는 장면이 나왔을 때, 이공팔의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그게 전부였다. 입은 열리지 않았다. 다만 소년의 자세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처음에 벽에 바짝 붙어 웅크리고 있던 몸이, 이제는 다리를 반쯤 펴고 등을 살짝 기울여 화면 쪽으로 상체가 기울어져 있었다. 무의식적인 이동. 중력이 아니라 흥미가 끌어당기는 방향으로.
누나.
소년이 또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영화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 목소리가 한층 더 작아져 있었다. 거의 숨소리에 가까운.
이거 끝나면 다른 거 또 틀어줘.
화면 속에서 피투성이 사내가 마지막 적을 베어넘기고 있었다. 이공팔의 눈동자에 그 붉은 빛이 고였다. 소년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즐거운 것이다. 단순하게, 명확하게. 창밖의 빨래가 바람에 펄럭이고, 부엌에서 수도꼭지 물소리가 났다. 평범한 여름 오후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공팔의 고개가 화면에서 임완청 쪽으로 돌아왔다. 소년의 눈이 커졌다. 정확히는, 동그란 안경테 뒤의 검은 눈동자가 화면의 붉은 잔상을 머금은 채 반짝거렸다. 입꼬리가 이미 올라가 있었다. 질문을 받기 전부터 올라가 있었지만, 이제는 더. 열네 살의 얼굴에 깃든 그 웃음은 기쁨이라기보다 발견에 가까웠다. 처음으로 사탕 맛을 본 혀처럼, 처음으로 자기 것이 된 무언가를 만진 손가락처럼.
응.
한 글자. 소년의 대답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한 글자에 실린 무게가 이상했다. 소년은 무릎에서 턱을 떼고 상체를 일으켰다. 등이 벽에서 떨어졌다. TV의 푸른 빛이 소년의 얼굴 절반을 비추고, 나머지 절반은 옷장의 그림자에 묻혀 있었다. 이공팔의 손가락이 자기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흥분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흥분을 음미하는 리듬이었다.
사람이 진짜 저렇게 싸워? 아니면 가짜야?
소년의 질문은 또 도덕과 무관했다. '왜 죽이냐'가 아니라 '이게 진짜냐'. 소년의 관심사는 선악이 아니라 진위였다. 화면 속의 피가 진짜 피인지, 잘린 팔이 진짜 팔인지. 이공팔은 임완청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한자가 세로로 흘러내리는 그 위로 소년의 검은 눈동자가 따라 움직였다. 글자를 읽고 있는 것인지, 그냥 움직이는 것을 쫓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소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 기대가 묻어 있었다. 조용히 하겠다는 약속 따위는 이미 여름 습기 속에 녹아 증발한 지 오래였다.
다음 거 틀어줘, 누나. 더 때리는 거.
소년의 요청은 단순했다. 더 많은 폭력, 더 많은 움직임, 더 많은 자극. 마치 배고픈 짐승이 밥그릇을 내미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톤이었다. 창밖에서 아래층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올라왔다. 부엌에서 어머니가 찬장을 닫는 소리. 임완청의 방 안, 벽 틈새에 박힌 소년의 눈만이 화면을 향해 빛나고 있었다.
아. 가짜구나.
소년의 목소리에 아쉬움은 없었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 위에 턱을 괴었다. 파란 화면의 빛이 소년의 안경 렌즈 위에서 네모나게 반사되었다. 임완청이 '어린 애가 쌈박질만 찾는다'고 한 말에 이공팔의 시선이 임완청에게로 돌아왔다. 소년의 표정은 억울함도, 반항도 아닌, 그저 갸웃함이었다. 왜 그게 이상한 건지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얼굴.
어린 애 아닌데. 나 열네 살이야.
소년이 손가락 하나를 펴 보였다. 열네 살이 어린 애가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로는 한없이 부족한 제스처. 하지만 소년의 얼굴은 진지했다. 진지하되 무겁지 않은. 마치 날씨 얘기를 하듯 자연스러운 톤. 이공팔은 다시 화면을 보았다. 파란 정전기.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빈 화면을 소년은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다음 테이프를 기다리는 눈이었다. 부엌에서 어머니가 수도꼭지를 잠그는 소리가 났고, 복도 너머 이웃집 TV에서 뉴스 시그널이 흘러나왔다.
근데 누나. 가짜인데 왜 진짜처럼 보여? 그거 어떻게 만드는 거야?
소년의 질문이 방향을 바꿨다. 폭력의 쾌감이 아니라 제작의 원리. 소년의 검은 눈동자가 임완청을 향해 고정되었다. 그 눈 안에 호기심이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선풍기가 고개를 돌려 소년의 앞머리를 한 번 쓸고 지나갔다. 이공팔의 손가락이 바닥 타일 위에서 멈춰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자세. 벽 틈새에 끼인 긴 몸이 임완청 쪽으로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여름 오후의 습기가 두 사람 사이의 공간에 차올랐다.
임완청의 말이 끝나자, 이공팔의 눈동자에 떠 있던 파란 정전기 빛이 흔들렸다. 연출. 영화감독. 많은 사람들. 소년의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처음 보는 장난감처럼 굴러다녔다. 가짜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에서, 이제는 그 가짜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것으로 흥미가 완전히 옮겨간 순간이었다. 소년은 턱을 괸 채 미동도 없이 임완청을 바라봤다. 마치 임완청이 다음 테이프를 넣어주길 기다렸던 것처럼, 이제는 다음 설명을 내어놓기를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소년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가 이해한 것을 확인하려는 듯, 혹은 방금 들은 낯선 단어를 제 입으로 굴려보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질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보육원의 선생에게 글자를 배울 때도 이런 눈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것은 생존에 필요 없는 지식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것은 달랐다. 화면 속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던 사내의 움직임만큼이나, 이공팔의 시선을 강력하게 붙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영화감독?
그 한 단어가 소년의 입에서 나왔다. 의문문이었지만,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인에 가까운 어조. 이공팔은 몸을 조금 더 앞으로 숙였다. 벽과 옷장 사이의 틈에 갇혀 있던 긴 다리가 마침내 해방되어 방바닥 위로 어색하게 뻗어 나왔다. 무릎이 임완청의 발끝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소년의 존재감이 그 좁은 공간을 순식간에 채워버렸다.
그 사람이 제일 높아?
소년의 두 번째 질문은 권력의 서열에 관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라는 말속에서 이공팔이 가장 먼저 파악한 것은 위계였다. 누가 명령하고, 누가 따르는가. 그것은 보육원에서, 그리고 잠시 스쳐 지나갔던 거리에서 그가 가장 먼저 익힌 생존의 문법이었다. 영화를 만드는 일조차 소년에게는 거대한 조직의 움직임으로 보였다. 이공팔의 눈이 반짝였다. 그 눈빛은 순수한 지적 호기심이라기엔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선풍기가 다시 방향을 틀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렀다. 눅눅한 바람이 이공팔의 땀에 젖은 앞머리를 흩날렸다. 소년은 임완청의 대답을 기다리며 숨을 참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집요했다. 마치 화면 속 외팔의 사내가 원수를 노려보던 눈빛처럼, 오직 한 가지 목표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임완청의 입. 그 입에서 나올 다음 단어. 소년은 주머니에서 낡은 빗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머리를 빗지는 않았다. 그저 빗살의 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초조함이 아니라, 기대감에 들뜬 손놀림이었다.
높고 낮은 게 어딨어. 서로 각자 협력하는 거지. 그 말이 방 안의 눅눅한 공기 속에 잠시 떠 있었다. 선풍기의 바람이 한 번 지나가고, VCR의 기계음만이 웅, 하고 낮게 울렸다.
이공팔의 손가락이 빗살 위에서 멈췄다. 소년의 검은 눈동자가 한 번 깜빡였다. 높고 낮은 게 없다. 협력. 그 단어가 소년의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보육원에서, 거리에서, 소년이 배운 세계는 언제나 명확한 서열이 있었다. 큰 놈이 작은 놈을 때리고, 먼저 온 놈이 나중 온 놈에게 자리를 빼앗긴다. 누군가는 반드시 위에 있고, 누군가는 반드시 밑에 깔린다. 그것이 이공팔이 열네 해 동안 몸으로 익힌 유일한 문법이었다. 그런데 이 누나는 그게 아니라고 했다. 소년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처음 듣는 종류의 소리여서.
…진짜?
소년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의심이 아니었다. 확인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경이에 가까운 톤이었다. 이공팔은 손에 쥔 낡은 빗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톡, 하고 타일 위에 플라스틱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소년의 긴 다리가 바닥 위에서 한 번 접혔다가 다시 펴졌다. 불안이 아니라 생각하는 동안의 무의식적인 움직임이었다. 소년의 시선이 꺼진 TV 화면으로 갔다가, 벽에 붙은 영화 포스터로 갔다가, 다시 임완청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럼 그 많은 사람들이 다 같이 하나 만드는 거야? 아무도 안 시키는데?
소년의 질문에는 순수한 의문만 담겨 있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는데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를 만든다는 개념. 그것이 소년에게는 화면 속의 가짜 피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모양이었다. 이공팔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 웃음은 조금 전의 것과 결이 달랐다. 흥분이나 기대가 아닌, 뭔가를 처음으로 상상해보는 얼굴. 소년은 안경을 한 번 밀어 올리고, 양 무릎을 감싸 안았다. 창밖에서 여름 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오후의 빛이 기울며 방 안의 그림자가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누나도 그거 할 거야? 그 영화 만드는 거.
소년이 물었다. 벽에 빼곡히 붙은 포스터들, TV 앞에 쌓인 비디오테이프 탑, 그리고 방금 임완청의 입에서 나온 말들. 소년은 그것들을 하나의 선으로 이었다. 이공팔의 검은 눈이 임완청의 얼굴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시선에는 판단도 평가도 없었다. 다만 궁금함. 이 누나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려는 사람인지. 소년은 오늘 처음 이 집에 왔고, 처음으로 영화라는 것을 보았고, 처음으로 위아래 없이 함께 만든다는 말을 들었다. 선풍기가 세 번째로 고개를 돌렸다. 이공팔의 땀 냄새와 낡은 플라스틱 빗 냄새가 방 안에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임완청의 대답이 방 안에 떨어졌다.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마도. 소년의 검은 눈동자가 그 말을 받아 한 번 굴렸다. 시켜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이공팔의 세계에서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시키는 놈이 있고, 시킴을 당하는 놈이 있고, 그 사이에서 맞지 않으려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소년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가 다물렸다. 임완청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건 알아서 뭐하게'라고 덧붙였을 때, 이공팔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강아지가 처음 듣는 소리에 반응하듯, 본능적인 각도로.
뭐하긴.
소년이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는 반박의 의도가 없었다. 이공팔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빗을 다시 집어 들고, 빗살 사이에 낀 먼지를 손톱으로 긁어냈다. 눈은 여전히 임완청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창밖에서 매미 소리가 한 박자 쉬었다가 다시 터져 나왔다. 선풍기의 회전 소리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소년의 무릎 위에 놓인 손이 한 번 꽉 쥐어졌다가 풀렸다. 무언가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소년의 머릿속에서, 처음으로 '원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형태를 갖추려 애쓰고 있었다. 그것은 배고픔이나 졸음처럼 즉각적인 욕구가 아니었다. 더 먼 곳을 향하는 무엇이었다.
나는 원하는 거 없었는데.
소년이 말했다. 담담했다. 슬픔도 자조도 아닌, 단지 사실의 나열. 이공팔은 열네 해를 살면서 무언가를 간절히 원해본 적이 없었다. 주어지면 받고, 빼앗기면 잊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었으니까. 소년의 안경 너머 눈이 천장을 향했다. 누렇게 변색된 페인트 위로 물 얼룩이 대륙의 형상처럼 번져 있었다. 소년은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임완청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근데 누나는 있잖아. 원하는 거.
이공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웃음에는 부러움도 비꼼도 없었다. 그저 관찰의 결과를 말하는 얼굴이었다. 소년은 방 안에 쌓인 비디오테이프 더미를, 벽에 테이프로 붙인 포스터들을, 그리고 영화 얘기를 할 때 미세하게 달라지는 임완청의 목소리 톤을 이미 읽어냈다. 열네 살짜리의 감각은 언어보다 빨랐다. 이공팔은 무릎을 풀고 다리를 쭉 뻗었다. 긴 발이 임완청의 침대 다리에 가볍게 부딪혔다. 소년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빗을 주머니에 다시 넣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여름 오후의 빛이 한 뼘 더 기울었다. 방 안의 그림자가 소년의 얼굴 절반을 덮었다.
좋겠다, 그런 거.
소년의 마지막 말은 거의 숨소리에 가까웠다. 부러워하는 것인지, 감탄하는 것인지, 본인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어조. 이공팔은 눈을 감았다. 선풍기 바람이 소년의 이마 위 땀을 한 겹 말렸다. 잠이 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오늘 하루 동안 너무 많은 것이 소년의 머릿속에 들어왔고, 그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복도 너머 어머니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이웃집 TV 소리가 채널을 바꾸며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나?
소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한 글자짜리 단어가 방 안에 떨어지자, 매미 소리마저 한 박자 쉬어간 것 같았다. 이공팔의 입이 반쯤 열린 채 멈춰 있었다. 소년은 자신을 가리키듯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길고 마른 손가락이 낡은 면 티셔츠의 천을 쥐었다. 그 동작에는 의심이 있었다. 너도, 라는 말 안에 포함된 '너'가 정말 자신을 가리키는 것인지 확인하려는 본능적인 반응. 보육원에서 이공팔에게 향하는 '너'는 대부분 꾸지람이거나 지시였다. 너도 뭔가를 해도 된다는 종류의 '너'는 처음이었다.
소년의 입꼬리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그러나 그 웃음은 완성되기 전에 멈췄다. 이공팔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안경 너머의 검은 눈동자가 임완청의 얼굴 위를 훑었다. 농담인지, 진심인지, 혹은 그냥 던진 말인지. 소년의 감각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창밖의 빛이 임완청의 뺨 위에 비스듬히 걸쳐 있었다. 코 옆의 점이 보였다. 소년은 그 점을 한 번 보고, 다시 임완청의 눈을 봤다.
나는 만드는 거 해본 적 없는데.
소년이 말했다. 거절이 아니었다. 불가능을 선언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사실이었다. 이공팔이 열네 해 동안 한 것은 부수는 것, 피하는 것, 견디는 것뿐이었다. 무언가를 '만든다'는 행위 자체가 소년의 경험 밖에 있었다. 그러나 소년의 목소리에는 닫힌 문의 느낌이 없었다. 오히려 열려 있었다. 선풍기가 다시 방향을 틀었다. 소년의 앞머리가 이마 위에서 한 번 흔들렸다. 이공팔은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었다. 그 자세로 임완청을 올려다보았다. 키가 더 작은 쪽에서 올려다보는 각도. 소년의 눈에는 여전히 질문이 남아 있었다.
뭘 만들어? 나도 그 영화 같은 거?
소년의 질문이 공기 속에 매달렸다. 이공팔의 검은 눈이 반짝였다. 그것은 욕심이 아니었고, 야망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가능성'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건네받은 소년의, 그 물건을 이리저리 뒤집어보는 눈빛이었다. 뜨거운 여름 오후, 좁은 방 안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쳐 있었다. 이웃집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노래가 벽을 타고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이공팔의 입가에, 아까 사라졌던 미소가 다시 돌아와 있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또렷하게.
원하는 거.
소년이 따라 말했다. 앵무새처럼. 그러나 그 반복에는 소년 나름의 작업이 들어 있었다. 입 안에서 그 단어의 무게를 재보는 중이었다. 이공팔은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타일 위에 놓인 자신의 맨발을 보았다. 발가락이 한 번 오므라들었다가 펴졌다. 소년은 '원하는 것'을 떠올리려 했다. 진심으로. 배고플 때 밥이 먹고 싶고, 맞을 때 안 맞고 싶고, 잘 때 따뜻하면 좋겠다는 것. 그런 것 말고. 임완청이 영화를 말할 때의 그 목소리처럼, 더 멀리 있는 무엇. 소년의 손가락이 바닥 타일의 이음새를 긁었다. 손톱 밑에 때가 꼈다. 소년은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몰라.
이공팔이 말했다. 짧고, 솔직했다. 거짓이 아니었다. 소년은 정말로 몰랐다. '원하는 것'이라는 서랍을 열었는데 안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의 얼굴에 실망은 없었다. 오히려 입꼬리가 올라갔다. 씩, 하고 이가 드러났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이 가늘어졌다. 그 웃음은 슬프지 않았다. 텅 빈 서랍을 발견한 것 자체가 소년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으니까. 서랍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는데, 이 누나가 그 서랍의 존재를 알려준 셈이었다.
근데 있으면 좋겠다. 그런 거 하나쯤.
소년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물 얼룩이 오후의 기울어진 빛 속에서 더 짙어져 있었다. 이공팔의 긴 다리가 바닥 위에서 한 번 꿈틀거렸다. 소년은 다시 임완청을 보았다. 코 옆의 점, 나른한 눈매, 약간 짜증 섞인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그 표정. 소년은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찾으면 누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줄게.
그 약속은 가벼웠다. 무게가 없었다. 열네 살짜리가 별 생각 없이 내뱉은 한 마디. 그러나 소년의 눈은 웃고 있었다. 진짜로. 이공팔은 다시 벽에 등을 기대고, 옷장과 벽 사이의 좁은 틈새에 몸을 밀어 넣었다. 선풍기 바람이 소년의 목덜미를 스쳤다. 여름 오후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복도 너머에서 어머니가 뭔가를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이웃집 아이의 울음소리가 벽을 타고 스며들었다. 이공팔은 눈을 반쯤 감은 채, 빈 서랍 하나를 머릿속에 남겨두었다. 언젠가 뭔가 들어갈지도 모르는, 처음으로 생긴 공간.
임완청의 심드렁한 대꾸가 방 안의 공기를 한 겹 더 느슨하게 만들었다. 아직 어리니까. 뭐, 그러던가. 그 말투에는 관심도 무관심도 아닌, 열아홉 살짜리 특유의 '됐고'가 묻어 있었다. 이공팔의 반쯤 감긴 눈이 다시 떠졌다. 소년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어리다는 단어가 소년의 어딘가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벽과 옷장 사이에 끼인 채로 이공팔의 긴 목이 임완청 쪽으로 돌아갔다. 안경이 코끝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있었다.
어리긴. 나 내년이면 중학교 졸업이야.
소년이 볼멘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진짜 화는 없었다.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눈은 웃고 있었다. 이공팔은 미끄러진 안경을 검지로 밀어 올리며 임완청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른한 눈매. 짜증인 듯 아닌 듯한 표정. 소년은 그 표정을 읽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귀찮아하면서도 내치지 않는 사람. 보육원에서 그런 어른은 드물었다. 대부분은 귀찮으면 진짜로 내쳤으니까. 선풍기가 다시 방향을 틀었고, 뜨거운 바람이 소년의 땀 젖은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이웃집 라디오에서 허관걸의 노래가 흘러나오다 끊겼다. 이공팔은 팔을 머리 뒤로 깍지 끼고 벽에 기댄 채, 천장의 물 얼룩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누나.
소년이 불렀다. 특별한 용건 없이. 그냥 불러보는 호칭. 이공팔의 입 안에서 그 두 글자가 굴러갔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단어였다. 보육원에서는 아무도 그를 동생이라 부르지 않았고, 그도 누구를 누나라 부른 적이 없었다. 소년의 시선이 천장에서 내려와 임완청의 뒷머리에 닿았다. 어두운 팥색 머리카락이 선풍기 바람에 한 올 두 올 흔들리고 있었다.
나 여기 오래 있어도 돼?
질문이 떨어졌다. 가볍게. 마치 내일 날씨를 묻듯이. 그러나 소년의 손가락이 바닥 타일의 이음새를 긁는 속도가 조금 빨라져 있었다. 이공팔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벽 틈새에 몸을 웅크린 채, 여름 오후의 열기 속에서 임완청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창밖에서 아이스크림 장수의 종소리가 골목을 타고 멀어져갔다. 소년의 맨발 발가락이 타일 위에서 한 번 오므라들었다. 그 동작은 거의 무의식이었다. 오래, 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놓고 나서야 소년은 자신이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표정이었다.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납득은 반쯤짜리였다. 이공팔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톡톡 두드려졌다. 소년은 임완청이 '질문이 이상하다'고 말한 부분을 곱씹고 있었다. 이상한가. 소년은 그게 왜 이상한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보육원에서는 항상 같은 방을 쓰는 애한테 물어봤다. 네 옆에 있어도 되냐고. 그게 규칙이었다. 먼저 자리 잡은 쪽이 허락해야 옆에 눌러앉을 수 있었다. 그래서 물은 것이었는데. 소년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이번에는 조금 멋쩍은 모양새였다.
근데 누나한테 물어본 거잖아. 같은 방 쓰는 건 누나니까.
소년이 말했다. 논리적이라기보다는 본능적인 대답이었다. 이공팔에게 '허락'의 대상은 서류 위의 보호자가 아니라, 바로 옆에서 숨 쉬고 있는 사람이었다. 선풍기가 세 번째로 방향을 틀었다. 뜨거운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소년은 다시 벽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쭉 뻗었다. 긴 다리가 좁은 방 바닥의 절반을 차지했다. 발끝이 임완청이 앉아 있는 쪽 근처까지 닿을 뻔했다가, 소년이 의식한 듯 살짝 거두어들였다.
누나 성인 되면 뭐 달라져? 술 사?
이공팔이 물었다. 호기심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소년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열네 살의 세계에서 '성인'이란 개념은 구체적인 형태가 없었다. 다만 뭔가 살 수 있게 되는 것, 뭔가 할 수 있게 되는 것 정도의 막연한 윤곽. 소년은 주머니에서 낡은 빗을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돌렸다. 빗살이 손가락 마디를 때리며 작은 소리를 냈다. 창밖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냄비 소리가 복도를 타고 흘러들어왔고, 여름 오후가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임완청의 말에 이공팔의 시선이 방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옷장과 벽 사이 틈에 놓인 소년의 짐이라고는 비닐봉지 하나. 안에 속옷 두 벌과 면티 한 장, 그리고 아까 그 낡은 빗. 그게 전부였다. 소년의 입에서 킥, 하고 짧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풀어놓았다는 표현이 우스웠는지, 아니면 그 적은 양의 짐이 우스웠는지. 소년은 비닐봉지를 턱으로 가리키며 고개를 까딱했다.
어. 다 풀었어. 짐 끝.
소년이 태연하게 말했다. 자조도 비참함도 없는 목소리였다. 그냥 사실이었다. 이공팔에게 짐이란 그 정도였고, 그 정도면 충분했다. 선풍기 바람이 비닐봉지의 손잡이를 팔랑거리게 만들었다. 소년의 시선이 다시 임완청에게로 돌아왔다. 임완청이 뱉은 '술담배는 이미 했다'는 뉘앙스를 소년은 정확히 읽지 못했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무게는 감지했다. 뭔가 더 먼 곳을 보고 있는 사람의 톤. 소년의 손가락이 빗살 위를 더듬었다.
임완청의 나른한 눈매가 창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소년은 그 시선의 방향을 따라갔다. 창밖에는 맞은편 건물의 빨래줄, 그 위에 널린 이웃집 러닝셔츠, 그 너머로 좁은 하늘 한 조각. 소년에게 그 풍경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임완청에게는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소년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물어보기로 했다. 이공팔은 모르는 것을 모른 채로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누나는 여기 나갈 거야?
소년이 물었다. 직감적인 질문이었다. 성인이 된다는 것, 그리고 달라지는 것. 임완청의 말투 사이에 끼어 있던 빈칸을 소년은 그렇게 채웠다. 나간다. 이 방, 이 집, 이 복도에서. 이공팔의 검은 눈이 임완청의 옆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비난도 붙잡음도 없는 시선. 그저 확인하려는 눈. 소년의 발가락이 타일 위에서 다시 한 번 오므라들었다. 저녁 해가 창틀 너머로 기울면서 방 안에 주황빛이 길게 깔렸다. 소년의 안경 렌즈에 그 빛이 반사되어 눈동자를 가렸다가, 소년이 고개를 살짝 숙이자 다시 까만 눈이 드러났다.
독차지.
소년이 그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 보았다. 혼잣말처럼. 맛을 보듯이. 이공팔의 입꼬리가 올라가야 할 타이밍이었다. 좋은 소식이니까. 방 하나를 통째로. 보육원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이층 침대 반 칸도 아니고, 옷장과 벽 사이 틈새도 아니고, 방 하나. 그런데 소년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웃음이 되다 만 표정이었다. 입꼬리는 올라갔는데 눈은 따라가지 못한 모양새. 소년은 그 불일치를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채 빗을 주머니에 다시 밀어 넣었다.
누나 대학교 가면 여기 안 와?
질문이 떨어졌다. 가볍게. 마치 내일 날씨를 묻듯이. 그러나 소년의 긴 다리가 무의식적으로 몸 쪽으로 당겨지고 있었다. 쭉 뻗어 있던 발이 무릎 가까이로 접혔다. 소년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공팔에게 '독차지'라는 단어는 '넓어진다'가 아니라 '비워진다'에 가까웠다. 방이 넓어지는 게 아니라, 이 방에서 임완청이 사라지는 것. 소년은 그 차이를 언어화할 줄 몰랐다. 다만 몸이 먼저 반응했을 뿐이었다. 오므라드는 발가락. 접히는 무릎. 보육원에서 익힌 자세. 뭔가가 사라지기 전에 몸을 작게 만드는 습관.
저녁 해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소년의 안경 렌즈가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이공팔은 무릎을 감싸 안은 채 임완청을 올려다보았다. 열네 살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슬픔이 아니었다. 서운함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 이전의 것. 아직 이름이 붙지 않은 감정. 소년은 그것을 모른 척 웃음으로 덮었다. 입꼬리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능숙하게.
그래도 가끔 와. 영화 틀어줘야 되잖아.
소년이 말했다. 목소리는 평소처럼 밝았다. 복도 너머에서 임완청의 어머니가 저녁 준비를 시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도꼭지 틀리는 소리, 도마 위에 칼이 닿는 소리. 이공팔은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반쯤 감았다. 방 안에 길게 드리운 주황빛이 서서히 보랏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소년의 맨발이 타일의 차가움을 느꼈다. 여름인데도 차가웠다. 아니, 해가 지고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