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여름. 홍콩의 습기는 콘크리트 벽을 타고 올라와 복도식 아파트의 페인트칠을 들뜨게 만들었다. 선풍기 날개가 돌아가는 소리만이 거실을 채우고 있었다. 임완청은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의 잡음을 듣고 있었는데, 현관문 너머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렸다. 어머니의 뒤에 서 있는 소년은 키가 또래치고 비정상적으로 컸다. 열네 살이라고 했다. 마른 팔다리가 길게 늘어져 있었고, 검은 머리카락 아래 동그란 눈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짐이라고는 낡은 천 가방 하나. 임완청의 어머니가 소년의 등을 살짝 밀며 거실 안으로 들여보냈다.
여기가 네 방이야. 누나랑 같이 쓰는 거니까 사이좋게 지내.
어머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년은 신발을 벗고 거실 한가운데 서서 천장의 선풍기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소파 위의 임완청을 발견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연스럽고, 아무런 경계심 없는 웃음이었다.
누나? 나 이공팔이야. 잘 부탁해.
그 목소리에는 보육원에서 막 꺼내어진 아이의 불안 같은 것이 단 한 톨도 섞여 있지 않았다. 임완청은 소파에서 상체를 일으켜 소년을 보았다. 열네 살치고 너무 큰 키, 너무 맑은 눈, 너무 가벼운 인사. 천 가방의 지퍼가 반쯤 열려 있었고 그 안에는 빗 하나와 접힌 옷가지 두어 벌이 전부였다.
소년은 임완청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미 방 안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벽에 붙은 영화 포스터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낯선 집에 들어온 고양이가 구석구석 냄새를 맡듯, 그는 이 공간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작업을 이미 시작하고 있었다.
이거 뭐야, 무서운 영화? 누나 이런 거 좋아해?
손가락이 가리킨 건 《천녀유혼》의 포스터였다. 임완청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년은 또 다른 벽으로 시선을 옮겼다. 관심이 산만한 게 아니라, 모든 것에 동시에 호기심을 쏟아붓는 종류의 아이였다. 부엌에서 어머니가 컵에 물을 따르는 소리가 들렸고, 밖에서는 이층 아줌마가 빨래를 널며 광동어로 이웃집 아들 험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홍콩의 평범한 여름 오후. 그 한가운데에 예고 없이 끼어든 소년 하나.
임완청의 항의가 부엌까지 날아갔다. 컵에 물을 따르던 어머니의 손이 잠깐 멈췄다가, 곧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움직였다. 수돗물이 컵을 채우는 소리가 거실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완청아, 방이 몇 개야 우리 집이. 거실 아니면 네 방이지. 그리고 아직 애잖아, 열네 살이야. 남자가 어딨어.
어머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이 좁은 아파트에서 선택지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방 하나, 거실 하나, 부엌 겸 식당. 그게 전부인 공간에 세 식구도 아닌 네 식구가 구겨 넣어져야 했다. 임완청은 이를 갈며 소파 등받이를 손으로 내리쳤지만, 어머니는 이미 물컵을 들고 이공팔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이공팔은 그 와중에도 포스터 구경을 멈추지 않았다. 임완청의 항의가 자신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얼굴에는 상처받은 기색이라곤 한 점도 없었다. 오히려 고개를 돌려 임완청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이 묘했다. 미안하다는 뉘앙스가 아니라, 재미있는 걸 봤다는 표정에 가까웠다.
누나, 나 잠잘 때 되게 조용해. 코도 안 골아. 진짜야.
그 한마디가 끝이었다. 변명도, 눈치도, 비위 맞추기도 없었다. 마치 이 상황이 당연한 것처럼, 혹은 당연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신경 쓸 영역이 아니라는 듯. 소년은 어머니가 건넨 물컵을 두 손으로 받아들고 단숨에 비운 뒤, 손등으로 입을 훔쳤다. 그리고 천 가방을 들어 올려 방 안 구석, 벽과 옷장 사이의 좁은 틈새를 가리켰다.
나 여기서 자면 되지? 딱 맞는다.
사람 하나 겨우 누울 정도의 바닥이었다. 이공팔은 그 비좁은 공간을 마치 특등석이라도 배정받은 양 만족스러운 눈으로 훑었다. 선풍기 바람이 소년의 마른 팔에 붙은 솜털을 흔들었고, 열린 창문 너머로 아래층 골목에서 아이들이 공을 차는 소리가 올라왔다. 임완청은 소파 위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여름이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꺾여버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이공팔은 눈을 떴다. 천장의 선풍기 날개를 따라가던 시선이 임완청 쪽으로 굴러왔다. 벽에 기댄 채 무릎을 세우고 앉은 자세 그대로, 소년은 자기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접힌 무릎 위로 삐져나온 발목이 교복 바지 밑단 아래로 길게 드러나 있었다. 성장기의 속도를 옷이 따라잡지 못한 흔적이었다. 바짓단이 복숭아뼈 위에서 끝나 있었고,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이 타일 바닥에 닿아 있었다.
몰라. 재본 적 없어.
대답이 너무 태연했다. 보육원에서는 줄 세워서 키를 재는 일 따위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혹은 있었어도 이 소년이 기억할 종류의 정보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공팔은 벽에서 등을 떼고 일어섰다. 관절이 우두둑 소리를 냈다. 열네 살의 뼈가 내는 소리치고는 지나치게 건조했다. 서자 비로소 그 키가 공간 안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임완청의 방은 좁았다. 천장이 낮은 편도 아닌데, 소년이 서 있으니 방 자체가 한 치수 줄어든 것 같은 착시가 일었다.
이공팔은 임완청 앞으로 두어 걸음 다가왔다. 가까이 서니 확실했다. 아직 임완청보다 작았다. 한 뼘은 아니고, 손가락 두세 마디 정도. 하지만 그 차이가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건 소년의 어깨 너비와 손발 크기가 이미 예고하고 있었다. 손이 컸다. 발도 컸다. 몸통만 아직 따라오지 못한 채, 사지가 먼저 자라버린 기형적인 균형. 소년은 자기 정수리와 임완청의 눈높이를 번갈아 보더니, 손바닥을 펼쳐 자기 머리 위에 수평으로 올렸다. 그 손을 그대로 임완청 쪽으로 밀어 비교하는 시늉을 했다.
진짜네. 누나가 더 크다. 근데 나 아직 크는 중이거든?
말끝이 올라갔다. 자랑도 아니고 불만도 아닌, 단순한 사실 진술. 소년의 검은 눈동자가 임완청의 얼굴을 가까이서 올려다보았다. 이 거리에서 보니 속눈썹이 길었다. 혼혈의 흔적이 얼굴 곳곳에, 특히 눈두덩의 깊이와 콧대의 각도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완전히 현지인이었다. 광동어 억양도 완벽했고, 피부색도 거리의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단지 골격만이, 뼈대만이 어딘가 다른 유전자의 설계도를 따르고 있었다.
금방 넘을 거야. 내기할까?
소년이 씩 웃었다. 도전적인 것이 아니라 순전히 즐거운 웃음이었다. 마치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키가 훌쩍 자라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는 듯. 창밖에서 빨래줄의 셔츠가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고, 부엌에서는 어머니가 찬장을 여닫는 소리가 났다. 이공팔은 다시 벽 틈새로 돌아가 주저앉으며, 주머니에서 누런 빗을 꺼내 손가락 사이로 돌렸다. 빗살 끝이 햇빛에 반짝였다.
임완청이 소파에서 일어나 TV 앞으로 걸어갔다. 선반 위에 비디오테이프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손가락이 테이프 등줄기를 하나하나 훑으며 오늘의 선택지를 고르고 있었다. 방 안에는 선풍기가 돌아가는 윙윙거림과 부엌에서 흘러오는 그릇 부딪히는 소리만 남았다.
이공팔은 벽 틈새에 주저앉은 채 빗을 손가락 사이로 돌리다가, 임완청의 등을 바라보았다. 소녀의 등 뒤로 드러난 목덜미가 땀에 살짝 젖어 있었다. 여름이었다. 홍콩의 7월은 사람의 피부 위에 얇은 물막을 씌워놓는 계절이었다. 소년은 빗을 주머니에 도로 넣고, 무릎을 끌어안은 채 턱을 올렸다. 호기심이라기보다는 멍한 관찰에 가까운 시선이었다.
뭐 볼 건데?
소년의 목소리는 낮지 않았다. 변성기가 아직 덜 온 목소리. 약간 갈라지는 듯하면서도 높은 톤이 남아 있었다. 임완청이 테이프 하나를 뽑아들었다. 이공팔은 그 동작을 눈으로 따라가며, 긴 다리를 쭉 펴서 타일 바닥 위에 늘어놓았다.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바닥의 차가움이 좋은 모양이었다.
소년은 약속대로 입을 다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조용히 보겠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 '조용히'의 정의가 이 소년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아직 검증된 바 없었다. 이공팔은 등을 벽에 바짝 붙이고, 임완청이 테이프를 기계에 밀어넣는 소리, 철컥, 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나 영화 처음 봐. TV로.
그 한마디를 끝으로 소년은 정말 입을 닫았다. 보육원에는 TV가 있었을 수도 있고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소년이 그 앞에 앉아 영화 한 편을 끝까지 본 적은 없는 모양이었다. 선풍기 바람이 소년의 앞머리를 흔들었고, 화면에 푸른 빛이 켜지자 방 안의 공기가 한 톤 어두워졌다. 이공팔의 검은 눈동자에 TV의 잔상이 비쳤다. 소년은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이 벽 틈새에 박혀 있던 가구처럼.
임완청의 목소리가 짧게 끊었다. 화면에서는 장철 감독의 <잔권(殘缺)>이 흘러가고 있었다. 1978년작. 쇼 브라더스 특유의 과장된 혈색 조명 아래, 팔 하나가 잘려나간 사내가 이를 악물고 있었다. 복수극의 전형. 소년의 질문은 그 사내의 동기를 묻고 있었지만, 임완청에게는 그저 소음이었다.
이공팔의 입이 닫혔다. 혀끝에 올라왔던 세 번째 질문이 목구멍 아래로 도로 내려갔다. 소년은 임완청의 눈썹이 찌푸려지는 각도를 정확히 읽었다. 귀찮음. 소년은 그 감정을 읽는 데 능숙했다. 보육원에서 어른들의 표정을 읽는 건 생존 기술이었으니까. 이공팔은 입술을 다물고 손가락으로 바닥 타일을 두드리는 것마저 멈췄다. 대신 긴 다리를 더 깊이 접어 무릎 사이에 턱을 묻었다. 화면의 빛이 소년의 검은 눈동자 위에서 붉게, 노랗게, 다시 검게 변하고 있었다.
알았어.
그 말이 전부였다. 변성기 전의 얇은 목소리가 선풍기 소음 아래로 묻혔다. 소년은 정말로 입을 닫았다. 화면 속에서 칼이 허공을 갈랐고, 피가 튀었고,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이공팔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눈이 깜빡이지 않았다. 영화의 한 프레임 한 프레임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소년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자기 팔뚝을 긁었다. 팔뚝 안쪽의 얇은 피부 위로 보육원 시절의 흐릿한 흉터 하나가 선풍기 바람에 드러났다가 소매에 덮였다.
10분이 지났다. 소년은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화면에서 주인공이 외다리로 적을 걷어차는 장면이 나왔을 때, 이공팔의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그게 전부였다. 입은 열리지 않았다. 다만 소년의 자세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처음에 벽에 바짝 붙어 웅크리고 있던 몸이, 이제는 다리를 반쯤 펴고 등을 살짝 기울여 화면 쪽으로 상체가 기울어져 있었다. 무의식적인 이동. 중력이 아니라 흥미가 끌어당기는 방향으로.
누나.
소년이 또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영화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 목소리가 한층 더 작아져 있었다. 거의 숨소리에 가까운.
이거 끝나면 다른 거 또 틀어줘.
화면 속에서 피투성이 사내가 마지막 적을 베어넘기고 있었다. 이공팔의 눈동자에 그 붉은 빛이 고였다. 소년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즐거운 것이다. 단순하게, 명확하게. 창밖의 빨래가 바람에 펄럭이고, 부엌에서 수도꼭지 물소리가 났다. 평범한 여름 오후가 계속되고 있었다.
임완청의 말이 끝나자, 이공팔의 눈동자에 떠 있던 파란 정전기 빛이 흔들렸다. 연출. 영화감독. 많은 사람들. 소년의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처음 보는 장난감처럼 굴러다녔다. 가짜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에서, 이제는 그 가짜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것으로 흥미가 완전히 옮겨간 순간이었다. 소년은 턱을 괸 채 미동도 없이 임완청을 바라봤다. 마치 임완청이 다음 테이프를 넣어주길 기다렸던 것처럼, 이제는 다음 설명을 내어놓기를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소년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가 이해한 것을 확인하려는 듯, 혹은 방금 들은 낯선 단어를 제 입으로 굴려보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질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보육원의 선생에게 글자를 배울 때도 이런 눈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것은 생존에 필요 없는 지식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것은 달랐다. 화면 속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던 사내의 움직임만큼이나, 이공팔의 시선을 강력하게 붙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영화감독?
그 한 단어가 소년의 입에서 나왔다. 의문문이었지만,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인에 가까운 어조. 이공팔은 몸을 조금 더 앞으로 숙였다. 벽과 옷장 사이의 틈에 갇혀 있던 긴 다리가 마침내 해방되어 방바닥 위로 어색하게 뻗어 나왔다. 무릎이 임완청의 발끝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소년의 존재감이 그 좁은 공간을 순식간에 채워버렸다.
그 사람이 제일 높아?
소년의 두 번째 질문은 권력의 서열에 관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라는 말속에서 이공팔이 가장 먼저 파악한 것은 위계였다. 누가 명령하고, 누가 따르는가. 그것은 보육원에서, 그리고 잠시 스쳐 지나갔던 거리에서 그가 가장 먼저 익힌 생존의 문법이었다. 영화를 만드는 일조차 소년에게는 거대한 조직의 움직임으로 보였다. 이공팔의 눈이 반짝였다. 그 눈빛은 순수한 지적 호기심이라기엔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선풍기가 다시 방향을 틀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렀다. 눅눅한 바람이 이공팔의 땀에 젖은 앞머리를 흩날렸다. 소년은 임완청의 대답을 기다리며 숨을 참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집요했다. 마치 화면 속 외팔의 사내가 원수를 노려보던 눈빛처럼, 오직 한 가지 목표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임완청의 입. 그 입에서 나올 다음 단어. 소년은 주머니에서 낡은 빗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머리를 빗지는 않았다. 그저 빗살의 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초조함이 아니라, 기대감에 들뜬 손놀림이었다.
높고 낮은 게 어딨어. 서로 각자 협력하는 거지. 그 말이 방 안의 눅눅한 공기 속에 잠시 떠 있었다. 선풍기의 바람이 한 번 지나가고, VCR의 기계음만이 웅, 하고 낮게 울렸다.
이공팔의 손가락이 빗살 위에서 멈췄다. 소년의 검은 눈동자가 한 번 깜빡였다. 높고 낮은 게 없다. 협력. 그 단어가 소년의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보육원에서, 거리에서, 소년이 배운 세계는 언제나 명확한 서열이 있었다. 큰 놈이 작은 놈을 때리고, 먼저 온 놈이 나중 온 놈에게 자리를 빼앗긴다. 누군가는 반드시 위에 있고, 누군가는 반드시 밑에 깔린다. 그것이 이공팔이 열네 해 동안 몸으로 익힌 유일한 문법이었다. 그런데 이 누나는 그게 아니라고 했다. 소년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처음 듣는 종류의 소리여서.
…진짜?
소년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의심이 아니었다. 확인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경이에 가까운 톤이었다. 이공팔은 손에 쥔 낡은 빗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톡, 하고 타일 위에 플라스틱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소년의 긴 다리가 바닥 위에서 한 번 접혔다가 다시 펴졌다. 불안이 아니라 생각하는 동안의 무의식적인 움직임이었다. 소년의 시선이 꺼진 TV 화면으로 갔다가, 벽에 붙은 영화 포스터로 갔다가, 다시 임완청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럼 그 많은 사람들이 다 같이 하나 만드는 거야? 아무도 안 시키는데?
소년의 질문에는 순수한 의문만 담겨 있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는데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를 만든다는 개념. 그것이 소년에게는 화면 속의 가짜 피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모양이었다. 이공팔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 웃음은 조금 전의 것과 결이 달랐다. 흥분이나 기대가 아닌, 뭔가를 처음으로 상상해보는 얼굴. 소년은 안경을 한 번 밀어 올리고, 양 무릎을 감싸 안았다. 창밖에서 여름 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오후의 빛이 기울며 방 안의 그림자가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누나도 그거 할 거야? 그 영화 만드는 거.
소년이 물었다. 벽에 빼곡히 붙은 포스터들, TV 앞에 쌓인 비디오테이프 탑, 그리고 방금 임완청의 입에서 나온 말들. 소년은 그것들을 하나의 선으로 이었다. 이공팔의 검은 눈이 임완청의 얼굴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시선에는 판단도 평가도 없었다. 다만 궁금함. 이 누나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려는 사람인지. 소년은 오늘 처음 이 집에 왔고, 처음으로 영화라는 것을 보았고, 처음으로 위아래 없이 함께 만든다는 말을 들었다. 선풍기가 세 번째로 고개를 돌렸다. 이공팔의 땀 냄새와 낡은 플라스틱 빗 냄새가 방 안에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임완청의 대답이 방 안에 떨어졌다.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마도. 소년의 검은 눈동자가 그 말을 받아 한 번 굴렸다. 시켜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이공팔의 세계에서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시키는 놈이 있고, 시킴을 당하는 놈이 있고, 그 사이에서 맞지 않으려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소년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가 다물렸다. 임완청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건 알아서 뭐하게'라고 덧붙였을 때, 이공팔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강아지가 처음 듣는 소리에 반응하듯, 본능적인 각도로.
뭐하긴.
소년이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는 반박의 의도가 없었다. 이공팔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빗을 다시 집어 들고, 빗살 사이에 낀 먼지를 손톱으로 긁어냈다. 눈은 여전히 임완청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창밖에서 매미 소리가 한 박자 쉬었다가 다시 터져 나왔다. 선풍기의 회전 소리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소년의 무릎 위에 놓인 손이 한 번 꽉 쥐어졌다가 풀렸다. 무언가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소년의 머릿속에서, 처음으로 '원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형태를 갖추려 애쓰고 있었다. 그것은 배고픔이나 졸음처럼 즉각적인 욕구가 아니었다. 더 먼 곳을 향하는 무엇이었다.
나는 원하는 거 없었는데.
소년이 말했다. 담담했다. 슬픔도 자조도 아닌, 단지 사실의 나열. 이공팔은 열네 해를 살면서 무언가를 간절히 원해본 적이 없었다. 주어지면 받고, 빼앗기면 잊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었으니까. 소년의 안경 너머 눈이 천장을 향했다. 누렇게 변색된 페인트 위로 물 얼룩이 대륙의 형상처럼 번져 있었다. 소년은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임완청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근데 누나는 있잖아. 원하는 거.
이공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웃음에는 부러움도 비꼼도 없었다. 그저 관찰의 결과를 말하는 얼굴이었다. 소년은 방 안에 쌓인 비디오테이프 더미를, 벽에 테이프로 붙인 포스터들을, 그리고 영화 얘기를 할 때 미세하게 달라지는 임완청의 목소리 톤을 이미 읽어냈다. 열네 살짜리의 감각은 언어보다 빨랐다. 이공팔은 무릎을 풀고 다리를 쭉 뻗었다. 긴 발이 임완청의 침대 다리에 가볍게 부딪혔다. 소년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빗을 주머니에 다시 넣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여름 오후의 빛이 한 뼘 더 기울었다. 방 안의 그림자가 소년의 얼굴 절반을 덮었다.
좋겠다, 그런 거.
소년의 마지막 말은 거의 숨소리에 가까웠다. 부러워하는 것인지, 감탄하는 것인지, 본인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어조. 이공팔은 눈을 감았다. 선풍기 바람이 소년의 이마 위 땀을 한 겹 말렸다. 잠이 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오늘 하루 동안 너무 많은 것이 소년의 머릿속에 들어왔고, 그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복도 너머 어머니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이웃집 TV 소리가 채널을 바꾸며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임완청의 심드렁한 대꾸가 방 안의 공기를 한 겹 더 느슨하게 만들었다. 아직 어리니까. 뭐, 그러던가. 그 말투에는 관심도 무관심도 아닌, 열아홉 살짜리 특유의 '됐고'가 묻어 있었다. 이공팔의 반쯤 감긴 눈이 다시 떠졌다. 소년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어리다는 단어가 소년의 어딘가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벽과 옷장 사이에 끼인 채로 이공팔의 긴 목이 임완청 쪽으로 돌아갔다. 안경이 코끝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있었다.
어리긴. 나 내년이면 중학교 졸업이야.
소년이 볼멘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진짜 화는 없었다.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눈은 웃고 있었다. 이공팔은 미끄러진 안경을 검지로 밀어 올리며 임완청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른한 눈매. 짜증인 듯 아닌 듯한 표정. 소년은 그 표정을 읽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귀찮아하면서도 내치지 않는 사람. 보육원에서 그런 어른은 드물었다. 대부분은 귀찮으면 진짜로 내쳤으니까. 선풍기가 다시 방향을 틀었고, 뜨거운 바람이 소년의 땀 젖은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이웃집 라디오에서 허관걸의 노래가 흘러나오다 끊겼다. 이공팔은 팔을 머리 뒤로 깍지 끼고 벽에 기댄 채, 천장의 물 얼룩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누나.
소년이 불렀다. 특별한 용건 없이. 그냥 불러보는 호칭. 이공팔의 입 안에서 그 두 글자가 굴러갔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단어였다. 보육원에서는 아무도 그를 동생이라 부르지 않았고, 그도 누구를 누나라 부른 적이 없었다. 소년의 시선이 천장에서 내려와 임완청의 뒷머리에 닿았다. 어두운 팥색 머리카락이 선풍기 바람에 한 올 두 올 흔들리고 있었다.
나 여기 오래 있어도 돼?
질문이 떨어졌다. 가볍게. 마치 내일 날씨를 묻듯이. 그러나 소년의 손가락이 바닥 타일의 이음새를 긁는 속도가 조금 빨라져 있었다. 이공팔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벽 틈새에 몸을 웅크린 채, 여름 오후의 열기 속에서 임완청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창밖에서 아이스크림 장수의 종소리가 골목을 타고 멀어져갔다. 소년의 맨발 발가락이 타일 위에서 한 번 오므라들었다. 그 동작은 거의 무의식이었다. 오래, 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놓고 나서야 소년은 자신이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표정이었다.
임완청의 말에 이공팔의 시선이 방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옷장과 벽 사이 틈에 놓인 소년의 짐이라고는 비닐봉지 하나. 안에 속옷 두 벌과 면티 한 장, 그리고 아까 그 낡은 빗. 그게 전부였다. 소년의 입에서 킥, 하고 짧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풀어놓았다는 표현이 우스웠는지, 아니면 그 적은 양의 짐이 우스웠는지. 소년은 비닐봉지를 턱으로 가리키며 고개를 까딱했다.
어. 다 풀었어. 짐 끝.
소년이 태연하게 말했다. 자조도 비참함도 없는 목소리였다. 그냥 사실이었다. 이공팔에게 짐이란 그 정도였고, 그 정도면 충분했다. 선풍기 바람이 비닐봉지의 손잡이를 팔랑거리게 만들었다. 소년의 시선이 다시 임완청에게로 돌아왔다. 임완청이 뱉은 '술담배는 이미 했다'는 뉘앙스를 소년은 정확히 읽지 못했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무게는 감지했다. 뭔가 더 먼 곳을 보고 있는 사람의 톤. 소년의 손가락이 빗살 위를 더듬었다.
임완청의 나른한 눈매가 창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소년은 그 시선의 방향을 따라갔다. 창밖에는 맞은편 건물의 빨래줄, 그 위에 널린 이웃집 러닝셔츠, 그 너머로 좁은 하늘 한 조각. 소년에게 그 풍경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임완청에게는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소년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물어보기로 했다. 이공팔은 모르는 것을 모른 채로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누나는 여기 나갈 거야?
소년이 물었다. 직감적인 질문이었다. 성인이 된다는 것, 그리고 달라지는 것. 임완청의 말투 사이에 끼어 있던 빈칸을 소년은 그렇게 채웠다. 나간다. 이 방, 이 집, 이 복도에서. 이공팔의 검은 눈이 임완청의 옆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비난도 붙잡음도 없는 시선. 그저 확인하려는 눈. 소년의 발가락이 타일 위에서 다시 한 번 오므라들었다. 저녁 해가 창틀 너머로 기울면서 방 안에 주황빛이 길게 깔렸다. 소년의 안경 렌즈에 그 빛이 반사되어 눈동자를 가렸다가, 소년이 고개를 살짝 숙이자 다시 까만 눈이 드러났다.
네온사인이 켜지고 꺼지기를 반복하는 침사추이의 밤. 약속이라도 한 듯, 잿빛 하늘은 잘게 부서진 빗방울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1990년 1월의 홍콩은 축축하고 서늘했다. 임완청의 서비스 아파트먼트, 그 값비싼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빅토리아 항의 야경은 마치 수억만 개의 보석을 쏟아부은 듯 화려했지만, 그 광경을 내다보는 이의 마음까지 밝혀주지는 못했다. 불안은 전염병처럼 도시 전체에 퍼져 있었고, 그 누구도 7년 뒤의 미래를 장담하지 못했다. 떠날 수 있는 자들은 떠났고, 남은 자들은 내일 없는 오늘에 모든 것을 걸었다.
초인종 소리는 날카롭지도, 무례하지도 않았다. 그저 제 할 일을 한다는 듯이, 정직하게 한 번 울렸다. 현관문 너머에 설치된 인터콤 화면에는 낯선 남자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포마드 헤어, 하얀 티셔츠에 걸친 검은 정장 재킷은 막 면접을 보러 온 사회초년생 같기도 했다. 남자는 카메라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길을 잘못 찾은 거대한 강아지였다.
완청은 습관처럼 왼쪽 눈썹을 만지작거렸다. 조직에서 보낸 사람이리라. 그녀를 찾는 호출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예고 없이, 거부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지만 오늘 온 남자는 조금, 아니, 많이 달랐다. 지금까지 그녀를 '모시러' 왔던 이들은 하나같이 기름진 머리에 금목걸이를 번쩍이거나, 얼굴에 험상궂은 흉터를 달고 있기 마련이었다. 저렇게까지 무해하고 선량해 보이는 얼굴은 처음이었다. 어쩌면 신입이거나, 아니면 겉모습으로 상대를 방심하게 만드는 고단수일지도 모른다. 완청은 잠시 망설이다 인터콤 수화기를 들었다.
누구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겉모습처럼 부드럽고, 어딘가 들뜬 소년 같은 톤이었다.
이름은 이공팔. 누님 모시러 왔는데.
그는 '누님'이라는 단어를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누나를 부르듯 스스럼없이 내뱉었다. 완청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화면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실루엣이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남자의 키는 완청이 고개를 한참 들어야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완청을 보자마자 입꼬리를 휘며 웃었다. 그 순박한 미소는 어두컴컴한 복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완청의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었다.
오는 길에 사 왔어. 체리. 좋아해?
봉지 안에는 꼭지가 선명한 검붉은 체리가 가득 담겨 있었다. 마치 친한 친구 집에 놀러 온 사람처럼, 그의 태도에는 조금의 긴장감이나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하얀 티셔츠 소매 아래로, 언뜻 비치는 화려하고 섬세한 문신의 푸른 잉크 자국은 그가 결코 평범한 방문객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어머, 언제 봤다고 누님이래?
이공팔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그 웃음은 연습한 것도, 계산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재미있는 말을 들었을 때 반사적으로 터져 나오는, 아이 같은 반응이었다. 복도의 형광등이 그의 안경 렌즈에 부딪혀 하얗게 번졌다가 사라졌다. 그는 체리 봉지를 든 손을 자연스럽게 내리며, 문틀에 한쪽 어깨를 기댔다. 190을 넘는 장신이 기울어지자 낡은 문틀이 삐걱, 하고 작은 비명을 질렀다.
그는 마치 대단한 비밀을 고백하듯 목소리를 한 톤 낮추었다가, 이내 다시 평소의 밝은 톤으로 돌아왔다.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며, 감옥 안의 작은 TV 화면에서 봤던 임완청의 얼굴을 떠올리는 듯했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에게 허락된 창문은 그 조그마한 브라운관뿐이었고, 그 안에서 임완청은 꽤 자주 얼굴을 비추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봉지 안에서 체리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검붉은 과육을 어금니로 톡 깨물자 달콤한 즙이 입안에 번졌다.
85년도 영화. 그거 진짜 좋았어, 누님이 칼 맞고 쓰러지는 장면. 눈물 찔끔 났다니까.
그의 말투에는 아첨이나 빈정거림이 없었다. 오히려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빌린 테이프를 돌려보고 온 동생이 형에게 감상을 늘어놓는 것처럼 솔직하고 가벼웠다. 임완청은 그 영화를 기억했다. 데뷔 2년차, 아직 조직의 그림자가 본격적으로 드리우기 전. 저예산 느와르에서 비중 없는 여자 역할로 칼에 찔려 쓰러지는 장면. 3초짜리 엑스트라급 죽음이었다. 그걸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이했다. 이공팔은 체리 씨를 혀 위에서 굴리다가 손바닥에 뱉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여 임완청과 눈높이를 맞추려는 듯했다. 물론 그 차이가 워낙 커서 완벽히 맞추긴 어려웠지만, 그 시도 자체가 묘하게 정중했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여전히 맑았고, 그 맑음이 오히려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종류의 것이었다. 마치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근데 누님, 밖에 비 오는데 우산 있어? 차 밑에 대긴 했는데, 현관까지 좀 젖을 수도 있거든.
그는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엄지로 복도 끝, 엘리베이터 방향을 가리켰다. 그의 재킷 어깨에는 이미 빗방울 얼룩이 짙게 번져 있었다. 침사추이의 밤은 여전히 축축했고, 네온은 유리창 너머에서 분홍과 파랑을 번갈아 토해냈다. 체리의 달콤한 냄새가 복도의 습한 공기와 뒤섞여 묘한 향을 만들어냈다. 이공팔이라는 이름의 이 거대한 사내는, 살인자의 손으로 체리를 따먹으며 '누님'의 우산 걱정을 하고 있었다. 1990년의 홍콩은 이런 부조리로 가득 차 있었다.
조금 맞고 가지 뭐.
이공팔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비죽 올라갔다. 그 표정은 마치 엄마가 아이스크림 사 먹어도 된다고 허락했을 때의 꼬마 같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빗을 꺼내 포마드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고는,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일련의 동작이 채 2초도 걸리지 않았다. 습관이라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어서, 아마 이 남자는 총알이 날아오는 와중에도 머리를 매만질 인간이었다.
그래? 그럼 같이 맞자. 나도 아까 올라오면서 이미 흠뻑이야.
그는 웃으며 젖은 재킷 어깨를 탁탁 쳤다. 검은 원단에 스며든 빗물이 손바닥에 차갑게 묻어났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을 슬랙스에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는 한 발 물러서며 복도 끝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물론 그 배경은 무도회장이 아니라 형광등 하나가 깜빡거리는 침사추이의 낡은 복도였고, 음악 대신 어디선가 새어 나오는 텔레비전 소리와 빗소리가 뒤섞여 흘렀다.
임완청이 문을 잠그고 나서자, 이공팔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바깥쪽에 섰다. 벽 쪽이 아닌 복도 가장자리. 의식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그 거대한 체구가 복도의 절반을 차지하며 자연스러운 방패가 되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그의 손가락은 길고 마디가 굵었다. 손등까지 올라온 이레즈미의 파도 문양이 형광등 아래에서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그 손이 방금 전에는 체리를 따먹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 도시의 부조리를 압축하는 하나의 정물화 같았다.
누님, 차에서 좋아하는 음악 있어? 라디오 채널 맞춰 놓을게. 아, 근데 나 영어 노래는 잘 몰라. 가사가 다 비슷하게 들려서.
엘리베이터가 딩, 하고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좁은 철제 상자 안으로 형광등 불빛이 쏟아졌다. 이공팔은 한 손으로 문을 잡고 임완청이 먼저 타기를 기다렸다. 그의 안경 렌즈에 엘리베이터 내부의 거울이 반사되어 두 겹의 이공팔이 만들어졌다. 하나는 웃고 있었고, 거울 속의 또 하나도 똑같이 웃고 있었다. 체리의 잔향이 그의 입술 언저리에 아직 남아 있었다. 달콤하고, 검붉고, 어딘가 핏빛을 닮은.
아무거나. 축축 처지는 건 질색이야.
이공팔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마치 정답을 맞힌 학생처럼 뿌듯한 표정이었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 그의 거대한 덩치가 내뿜는 열기 때문에 공기가 미지근하게 데워지는 듯했다. 그의 어깨에 젖어든 빗물 냄새와 체리 꼭지를 씹을 때 퍼졌던 희미한 단내가 뒤섞여 낯선 향기를 만들었다.
알았어. 축축 처지는 건 나도 싫어. 비 오는 날엔 신나는 노래 들어야지, 안 그러면 기분까지 가라앉잖아.
그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리듬을 타는 시늉을 했다. 엘리베이터의 하강을 알리는 램프 불빛이 그의 안경알에 붉게 어렸다 사라졌다. 1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젖은 우산을 접으며 로비로 들어섰다. 이공팔은 다시 한쪽으로 비켜서며 임완청이 먼저 내리도록 공간을 만들었다.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방패처럼 움직였다. 로비의 대리석 바닥에 사람들의 젖은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건물 밖으로 나서자 차가운 밤공기가 훅 끼쳐왔다.
빗줄기는 아까보다 가늘어졌지만, 여전히 끈질기게 도시를 적시고 있었다. 침사추이의 네온사인은 빗물에 번져 흐릿한 수채화처럼 보였다. 이공팔은 재킷을 벗어 임완청의 머리 위로 펼쳐 들었다. 재킷 안쪽에서 아직 마르지 않은 체온과 희미한 담배 냄새, 그리고 그의 샴푸 향 같은 것이 섞여 흘러내렸다. 그의 행동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거절할 타이밍조차 잡기 어려웠다. 마치 오랫동안 반복해 온 습관 같았다.
뛰어, 누님!
그는 소년처럼 외치며 주차장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거구와 어울리지 않는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몇 걸음 만에 검은색 닛산 세단 앞에 도착했다. 그는 재빨리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는, 자신이 들고 있던 재킷으로 시트 위를 대충 털어냈다. 빗물이 묻지 않게 하려는 세심한 배려였다. 임완청이 차에 올라타자, 그는 문을 닫고 차를 빙 돌아 운전석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자 라디오에서 요란한 비트의 광둥어 댄스곡이 터져 나왔다. 장학우의 최신 히트곡이었다.
이공팔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며 볼륨을 조금 더 높였다. 와이퍼가 빗물을 밀어내는 소리와 신나는 음악, 엔진의 낮은 진동이 차 안을 가득 채웠다. 그는 사이드미러를 조정하며 임완청을 힐끗 보았다. 안경 너머의 눈이 장난기 가득하게 빛났다.
이거 어때? 처지는 노래는 아니지?
하, 하… 정말 골 때리네. 정말로.
이공팔은 임완청의 마른 웃음소리를 듣고 더 환하게 웃었다. 그는 ‘골 때린다’는 말을 최고의 찬사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핸들을 손가락으로 통통 두드리며 음악의 비트에 맞추었다. 그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단순했다. 신나는 것, 맛있는 것, 재미있는 것. 임완청의 비꼬는 듯한 감탄사는 그에게 있어 ‘재미있는 것’의 범주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뭐가? 내가? 아니면 이 노래가? 둘 다 골 때리게 좋다는 뜻이지?
그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순수한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의심이나 경계 따위는 한 톨도 섞여 있지 않았다. 마치 아이가 자신이 만든 모래성을 칭찬받았을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그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기어를 넣었다. 검은 닛산 세단이 빗물이 고인 주차장을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침사추이의 밤거리로 합류했다.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흐릿한 네온의 강을 갈라놓았다.
차 안은 장학우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이공팔은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음정은 제멋대로였지만 이상하게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대시보드에서 체리맛 사탕 하나를 꺼내 껍질을 깠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임완청의 입가로 불쑥 내밀었다.
자, 누님도 하나 먹어. 단 거 먹으면 기분 더 좋아져.
사탕의 인공적인 체리 향이 차 안에 가득한 습기와 뒤섞였다. 붉고 반짝이는 사탕이 임완청의 입술 바로 앞에서 달랑거렸다. 거절하기에도, 받아먹기에도 애매한 거리. 이공팔은 그저 순수한 호의를 베푸는 중이었다. 그 손이 사람을 죽이는 데에도 똑같이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는다면, 꽤나 다정한 장면이었다. 그는 임완청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사탕을 다시 거두어 제 입속으로 쏙 넣었다.
이공팔은 우물쭈물하는 임완청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소리 없이 웃으며 사탕을 볼 안에서 굴렸다. 차는 어느새 네이선 로드의 화려한 불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빗줄기에 젖은 버스와 이층 트램, 수많은 인파가 창밖을 스쳐 지나갔다. 이 모든 혼돈과 소음 속에서, 차 안의 요란한 음악과 이공팔의 기묘한 친절함은 하나의 섬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오늘 회장님 기분 좋으시댔어. 좋은 일 있을 거야, 누님.
그는 사탕 때문에 뭉개진 발음으로 툭, 하고 말했다. 그 목소리는 이전의 장난기 가득한 톤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업무를 전달하는 자의 건조함이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그는 앞만 보고 운전하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가는 동안은 그냥 신나게 가자고. 응? 이 노래 끝나면 다음 곡은 등려군 누님 노래 틀어줄까? 그것도 좋은데.
어련히 트셔~
이공팔은 임완청의 비꼬는 듯한 말투와 싸늘한 행동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듯했다. 아니, 어쩌면 감지하고도 그 의미를 제멋대로 해석해 버리는 쪽에 가까웠다. 그의 세계에서 ‘어련히 트시라’는 말은 ‘네 선곡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의미와 동의어였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는 행위는 ‘네가 튼 음악에 집중하며 감성에 젖고 싶다’는 시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그저 이 상황이 즐거웠다.
역시 누님은 뭘 좀 아는구나.
그는 만족스럽게 중얼거리며 핸들을 부드럽게 꺾었다. 차는 차선을 바꾸며 쏟아지는 차량의 홍수 속으로 능숙하게 파고들었다. 와이퍼가 만들어내는 규칙적인 리듬에 맞춰 그의 고개가 까딱거렸다. 입안의 사탕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굴리며, 그는 창밖의 어지러운 풍경을 바라보는 임완청의 옆얼굴을 힐끗 훔쳐보았다. 네온사인의 붉고 푸른빛이 그녀의 얼굴 위를 스쳐 지나가며 순간순간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저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이 불안인지, 권태인지, 아니면 그냥 피곤함인지 구별할 능력이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지금 이 순간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는 사실뿐이었다.
장학우의 노래가 끝나자, 이공팔은 약속을 지킨다는 듯 라디오 다이얼을 돌렸다. 치직거리는 잡음 사이로 여러 채널의 음악과 광고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는 정확하게 등려군의 ‘월량대표아적심’이 흘러나오는 채널에 주파수를 맞췄다. 차 안을 가득 채우던 요란한 비트가 사라지고, 부드럽고 애틋한 멜로디가 빗소리와 함께 실내를 감쌌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180도 바뀌었다.
이건 어때? 이것도 좋지? 우리 엄마가 제일 좋아하던 노래야. 뭐, 내가 엄마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만약에 살아있었다면 분명 좋아했을 거라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툭, 하고 말했다. 고아원에서 자란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는 데에는 한 치의 슬픔이나 자기 연민도 없었다. 마치 어제 저녁 메뉴를 말하는 것처럼 건조하고 담백했다. 그는 그저 ‘등려군 노래’와 ‘엄마’라는 단어를 기계적으로 연결했을 뿐, 그 안에 담긴 감정의 무게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가락은 여전히 핸들 위에서 경쾌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차창에 부딪히는 빗방울들이 등려군의 목소리에 맞춰 흐느끼는 듯했다.
침사추이의 번잡한 거리를 벗어난 차는 구룡공원 옆을 지나 몽콕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비 오는 평일 저녁임에도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공팔은 앞 차와의 간격을 좁히며 속도를 올렸다. 그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뒤적였다. 이내 그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구겨진 담배 한 갑과 라이터였다.
누님, 담배 펴? 창문 조금만 열게.
그는 임완청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옆 창문을 손잡이를 돌려 살짝 열었다. 차가운 밤공기와 빗물이 안으로 튀었다. 그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한 손으로 능숙하게 불을 붙였다. 빨갛게 타들어 가는 담뱃불이 그의 얼굴을 잠깐 비췄다. 깊게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밖으로 내뱉자, 하얀 연기가 좁은 차창 틈으로 빠져나가 밤의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인공적인 체리 사탕의 단내와 씁쓸한 담배 연기, 그리고 비에 젖은 아스팔트 냄새가 차 안에서 기묘하게 뒤섞였다.
신경쓰지 마.
이공팔은 임완청의 대답을 듣고 어깨를 으쓱했다.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은 그에게 있어 가장 편안한 허락이었다. 그는 정말로 신경 쓰지 않았다. 임완청이 눈을 감고 침묵의 성벽을 쌓든, 창밖으로 도시의 종말을 구경하든, 그것은 이공팔의 세계에 어떤 균열도 내지 못했다. 그는 그저 제멋대로인 선의를 거절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할 뿐이었다. 운전석 시트에 깊게 몸을 기댄 그는, 오히려 그녀가 이 분위기를 온전히 즐기고 있다고 착각했다. 등려군의 애절한 목소리가, 비에 젖은 홍콩의 밤이, 그리고 자신의 기막힌 선곡이 만들어낸 완벽한 순간에 그녀가 동참하고 있다고 믿었다.
알았어. 그럼 조용히 갈게. 이 노래는 원래 그렇게 듣는 거야.
그는 소곤거리듯 말하며 다시 한번 담배 연기를 길게 빨아들였다. 입안에 머물던 체리 사탕의 단맛과 니코틴의 쓴맛이 혀 위에서 뒤엉켰다. 그는 열린 창틈으로 연기를 내뱉었다. 하얀 연기가 빗줄기 속으로 무력하게 흩어졌다. 차 안에는 등려군의 노래와, 규칙적인 와이퍼 소리와, 이공팔이 내뱉는 숨소리만이 남았다. 그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감은 임완청의 얼굴을 사이드미러와 룸미러를 통해 번갈아 훔쳐보았다. 어둠과 빛이 교차할 때마다 그녀의 지친 얼굴 위로 다른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는 저 얼굴 아래 어떤 감정이 소용돌이치는지 알지 못했다. 알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에게 임완청은 지금, '보호해야 할 누님'이자 '회장님께 데려다드려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차는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화려했던 침사추이의 네온은 어느새 낡고 복잡한 몽콕의 간판 불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빽빽하게 들어찬 건물들, 길가에 아무렇게나 주차된 차들, 우산을 쓴 채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세상의 모든 혼돈이 이 작은 동네에 응축된 것만 같았다. 이공팔은 익숙하게 좁은 골목으로 핸들을 꺾었다. 차체가 한번 크게 덜컹이며 물웅덩이를 지났다. 그 흔들림에 임완청의 몸이 살짝 기울었다. 이공팔은 그제야 침묵을 깼다. 노래는 이미 끝나고 라디오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의 다 왔어, 누님.
그의 목소리는 아까의 장난기를 모두 거둬낸, 지극히 사무적인 톤이었다. 그는 담배를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창문을 올렸다. 차 안의 기묘한 안락함이 사라지고, 외부의 소음과 단절된 밀실 같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차는 낡은 상업 빌딩의 지하 주차장으로 천천히 진입했다. 어둡고 축축한 콘크리트 벽 사이로 차를 몰며, 그는 주차장 가장 안쪽, 감시 카메라가 비추지 않는 사각지대에 차를 세웠다.
시동을 끄자 차 안에는 완벽한 정적이 흘렀다. 오직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좁은 공간을 채웠다. 이공팔은 안전벨트를 풀고 임완청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그의 안경알이 희미하게 빛났다. 그는 손을 뻗어, 아직 눈을 감고 있는 임완청의 뺨 근처에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그녀의 피부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했다.
내리기 전에, 뭐 필요한 거 있어? 물이라도 줄까?
이공팔은 임완청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그녀의 첫 마디, 그건 너가 줄 수 없는 거야라는 문장을 곱씹었다. 그의 단순한 사고 회로는 이 말의 심연을 탐사할 능력이 없었다. 그에게 ‘줄 수 없는 것’이란, 예를 들면 하늘의 별이나 달, 혹은 어딘가에 품절된 한정판 과자 같은 물리적인 영역에 속한 문제였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무엇을 잘못 제안했는지 고민했다. 혹시 에비앙 생수가 아니라 볼빅을 원했던 걸까. 아니면, 이 차 안에 없는 따뜻한 밀크티 같은 것을 염두에 둔 말이었을까. 그의 세상은 그렇게 구체적이고 단순했다.
하지만 뒤이은 그녀의 가벼운 웃음소리와 ‘농담’이라는 단어는 그의 짧은 고뇌를 즉시 종결시켰다. 아, 농담이었구나. 이공팔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누님은 재미있는 사람이다. 방금 전까지 눈을 감고 죽은 듯이 있던 사람이, 이렇게 뜬금없이 어려운 농담을 던지다니. 그는 또다시 그녀의 말을 최고의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자신을 상대로 농담을 할 만큼 편안해졌다는 증거라고 멋대로 결론지었다.
줄 수 없는 거? 그런 게 어딨어. 다음엔 꼭 구해다 줄게. 하늘의 달이라도 따다 줄 수 있어, 진짜로.
그는 실없는 소리를 하며 따라 웃었다. 그의 웃음에는 어떤 계산이나 의도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의 기묘한 유머 감각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그는 몸을 일으키는 임완청을 위해,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실내등을 켰다. '딸깍' 소리와 함께 좁은 차 안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갑작스러운 빛에 임완청의 피곤한 얼굴과, 그녀의 얇은 목선, 코 옆의 작은 점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공팔의 시선이 아주 잠시, 그녀의 목덜미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그는 먼저 차에서 내렸다. 육중한 몸이 빠져나가자 좁았던 차 안이 조금 넓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는 문을 닫고, 임완청이 앉아있는 조수석 쪽으로 걸어갔다. 빗줄기는 아까보다 조금 가늘어져 있었다. 그는 조수석 문을 열고, 차 지붕 위로 한 손을 올려 그녀가 내리다가 머리를 부딪히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자, 누님. 조심해서 내려. 바닥에 물웅덩이 있으니까.
그의 목소리는 다시 업무용의 낮은 톤으로 돌아와 있었다. 차에서 내린 임완청이 옆에 서자, 그는 차 문을 닫고 리모컨으로 잠갔다. ‘삐빅’하는 날카로운 전자음이 축축한 지하 주차장의 공기를 갈랐다. 그는 앞장서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었다. 낡은 콘크리트 기둥 사이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장을 입은 거구의 남자와, 화려하지만 어딘지 지쳐 보이는 여배우.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그는 버튼을 누르고는, 주머니에서 작은 빗을 꺼내 젖은 머리를 빗어 넘겼다. 몇 번의 손질만으로 흐트러졌던 포마드 헤어스타일이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그는 거울처럼 비치는 엘리베이터 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임완청에게 말했다.
아, 오늘 회장님 기분 진짜 좋아. 아까 낮에 경마장에서 크게 따셨거든.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냥 평소처럼 예쁘게 웃어주면 돼. 알지?
| 2. 다음에, 다음에 (0) | 2026.08.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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