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3월의 어느 저녁이었다. 완차이 뒷골목 바의 셔터가 반쯤 내려가 있었고, 이공팔은 그 앞에 서서 담배를 물고 있었다. 불은 붙이지 않았다. 라이터를 세 번 켰다가 세 번 다 껐다. 손이 떨려서가 아니었다. 그냥 붙일 이유를 못 찾았다. 그게 이상했다. 이 남자는 이유 없이 하는 일이 대부분인 인간이었다. 흥이 나면 하고, 안 나면 안 했다. 그런데 오늘은 흥이 나지 않는 게 아니라, 흥이라는 게 어디쯤에 있었는지 위치를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셔터 안쪽에서 임완청이 유리잔을 닦고 있었다. 등이 보였다. 얇은 어깨. 도드라진 견갑골. 2년 전과 똑같았다. 이공팔은 그 등을 보면서, 아주 조용하게, 어떤 문장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지켜봤다. 없어도 살겠구나.
충격이 없었다. 그게 제일 이상했다. 배신감도 없고 슬픔도 없고 죄책감도 없었다. 감옥에서 8년을 보내면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인간은 뭐든 익숙해진다는 것이었다. 밥 시간에 익숙해지고, 철창 소리에 익숙해지고, 옆방 남자가 밤마다 우는 소리에도 익숙해진다. 그리고 익숙해지면 그건 더 이상 필요가 아니라 습관이 된다. 이공팔은 임완청의 맥박을 짚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밤마다 확인했다. 살아 있나. 여기 있나. 그런데 언제부턴가 짚지 않아도 알겠는 것이다. 살아 있겠지. 어디 있든. 그 확신이 생기는 순간, 손을 뻗을 이유가 하나 사라졌다. 이공팔은 담배를 도로 갑에 집어넣었다. 아깝잖아.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셔터를 밀고 들어갔다. 종이 울렸다. 임완청이 고개를 들었다. 이공팔은 웃었다. 언제나처럼. 입꼬리가 올라가는 속도도, 눈이 반달로 접히는 각도도 똑같았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게 이 남자의 가장 잔인한 재능이었다. 노인정에서 재롱을 떨던 얼굴 그대로 사람의 손목을 그을 수 있는 인간. 그러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음이 한 칸 물러난 것을 얼굴에 숨기는 일 따위는.
오늘 마감 몇 시야. 기다릴게.
이공팔이 바 스툴에 앉으며 말했다. 팔꿈치를 카운터에 올리고 턱을 괬다. 임완청의 손이 유리잔을 놓는 자리를 눈으로 따라갔다. 왼손 약지 아래 굳은살. 2년 사이에 생긴 것. 시급 28달러가 만든 흔적이었다. 이공팔은 그걸 보면서 생각했다. 예전 같았으면 저 손을 잡아서 뒤집어 봤을 것이다. 왜 이렇게 됐냐고 물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냥 봤다. 보기만 했다. 손을 뻗지 않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이공팔은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크고, 마디가 굵고, 오래된 흉이 세 개 있는 손. 이 손이 지난 2년 동안 임완청을 붙잡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붙잡을 필요가 없어진 지 오래였는지도 몰랐다. 붙잡지 않아도 도망가지 않으니까. 도망가도 찾아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이제 안 잡아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공팔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게 핵심이었다. 없어도 살 수 있다는 것과 없이 살겠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장이었고, 이 남자는 그 차이를 본능적으로 알았다. 감옥이 편했던 이유도 같았다. 나갈 수 없어서 편한 게 아니라, 나갈 필요가 없어서 편했던 것이다. 이공팔은 카운터 위에 놓인 재떨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리듬이 있었다. 아무 의미 없는 리듬. 그러다 문득 손을 뻗어, 임완청이 닦고 있던 유리잔을 가져갔다. 물기가 남아 있는 잔. 자기 소매로 마저 닦았다. 검은 정장 소매가 젖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완청아. 나 오늘 좀 이상해.
이공팔이 말했다. 웃는 얼굴 그대로였다. 목소리도 평소와 똑같이 늘어져 있었다. 그런데 잔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유리가 삐걱거릴 정도로. 이 남자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몰랐다. 정말로 몰랐다. 고독을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은 그 반대편도 인지하지 못한다. 다만 몸이 먼저 알았다. 없어도 산다는 걸 깨달은 저녁에, 이 남자의 발은 여전히 이 바 앞으로 걸어왔다는 사실을. 그게 답이었다. 필요해서 오는 게 아니라, 오고 싶어서 오는 것.
임완청의 목소리가 카운터를 넘어왔다. 뭐가 이상해. 유리잔을 닦는 손이 멈추지 않았다. 고개만 살짝 돌렸다. 눈이 이공팔을 봤다. 자홍색 홍채가 바의 낮은 조명 아래서 검게 가라앉아 있었다. 2년 전에도 이 눈이었다. 헬싱키의 눈보라 속에서도, 완차이의 좁은 침대 위에서도, 언제나 같은 온도로 이공팔을 훑던 눈. 그런데 오늘따라 그 시선이 이공팔의 피부 위에 닿는 감촉이 달랐다. 예전에는 뜨거웠다. 지금은 미지근했다. 아니, 이공팔 쪽이 달라진 것이었다. 받아들이는 피부의 온도가.
이공팔은 유리잔을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톡. 소리가 작았다. 이 남자치고는 너무 조용한 동작이었다. 평소라면 탁, 하고 내려놓거나, 아예 임완청의 손에 억지로 돌려주면서 손가락을 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잔만 놓고 손을 거뒀다. 거두는 게 자연스러웠다. 그게 이상한 것이었다. 이공팔은 안경 너머로 임완청의 얼굴을 봤다. 코 옆 점. 눈밑 점. 전부 외운 지형이었다. 어느 골목에서 어느 골목으로 이어지는지까지 다 아는 동네. 그런데 오늘은 그 동네를 걷고 싶다는 충동이 평소보다 반 박자 느리게 왔다. 반 박자. 고작 그만큼이었다. 그런데 이공팔은 그 반 박자를 알아챈 것이다. 본능이 예민한 인간이었으니까. 칼을 들 때도 반 박자 빠르게 움직여서 살아남은 인간이었으니까.
몰라. 그냥 이상해.
이공팔이 대답했다. 웃고 있었다. 눈이 반달이었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성실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손이 카운터 위에 가만히 놓여 있었다. 보통 이 시간이면 임완청의 손목을 잡거나, 머리카락을 만지거나, 최소한 어깨에 턱을 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2년간 쌓인 습관이었다. 맥박을 짚는 습관. 존재를 확인하는 습관. 그런데 오늘 이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확인하지 않아도 알았다. 임완청은 여기 있다. 살아 있다. 유리잔을 닦고 있다. 시급 28달러를 벌고 있다. 그걸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밤이 온 것이었다.
바 안쪽에서 라디오가 울렸다. 광동어 뉴스. 항셍지수가 어쩌고. 부동산이 어쩌고. 1994년의 홍콩은 여전히 돈과 불안 사이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이공팔은 그 소리를 배경으로 깔면서 임완청의 등을 봤다. 얇은 셔츠 아래로 견갑골이 움직이고 있었다. 잔을 닦을 때마다. 왼쪽, 오른쪽. 리듬이 있었다. 이공팔은 그 리듬을 세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예전에는 이 리듬을 세면서 욕심이 났다. 저 등에 입을 대고 싶다는 충동. 어깨죽지를 깨물고 싶다는 감각. 지금도 있었다. 있긴 했다. 그런데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 '괜찮을 것 같다'가 이공팔을 이상하게 만든 것이었다.
너 없어도 살 것 같아서.
그런데 이공팔의 손가락이 카운터를 두드리고 있었다. 톡톡톡. 아까보다 빨라진 리듬. 무의식이었다. 이 남자의 몸은 머리보다 정직했다. 없어도 산다는 말을 하면서, 발은 여기 와 있고, 엉덩이는 이 스툴에 붙어 있고, 눈은 임완청의 등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공팔은 그 모순을 인지하지 못했다. 고독을 모르는 인간이 외로움도 모르듯이, 필요를 넘어선 감정의 이름을 이 남자는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근데 여기 왔잖아. 그게 이상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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